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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창열 선생 기고] 역사 바로 알기 시리즈 7탄- 고려장은 없었다
    옥창열 시인/프로필 - 동국대 졸업, 특정직 국가공무원(3급) 퇴직 - 경기한국수필가협회 부회장 역임 - 『워낭소리의 추억』 등 수필집 3권, 시조집 2권 출간 - 글벗문학상, 석교시조문학상, 경기문학인대상 수상 - 문학 및 음악 유튜브 채널 『시, AI선율로 피어나다』 운영 - 대중가요 450곡 국내외 14개 음반사 발매 옛날 고려에서는 늙은 부모를 산에다 버렸다는 속설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고려장(高麗葬)’이라 불렀고, 마치 우리 조상들이 효를 몰랐다는 증표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도 “어디가 고래장(경상도 발음) 터였다더라”는 둥 발 달린 소문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공부를 해보니,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바람은 돌을 깎지,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고려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외지인의 잘못된 인식과 식민의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슬픈 전설이다. 고려시대는 노인을 버리기는커녕, 효를 법으로 강제하던 시대였다. 『고려사』를 들춰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 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재산을 따로 나누고 공양하지 않으면 죄로 다스린다.” 또 다른 기록에는, 효자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노인들에게 예물을 하사한 왕의 손길이 적혀 있다. 이런 나라에서 과연 늙은 부모를 산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겠는가. 말은 마음의 그릇이라 했거늘, 왜곡된 말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오랜 세월 헷갈리게 했던가. 고려장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건 고려시대가 아니라, 1882년 미국인 그리피스의 책 『은자의 나라 코리아』에서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조선 땅을 밟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조선은 일본인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조선’이었다. 거기엔 조선인의 숨결도, 역사도 없었다. 그리고 1924년, 일제 조선총독부는 『조선동화집』에 ‘부모를 산에 버린 사내’ 이야기를 실었다. 마치 우리 민족이 비정하고 패륜적이라는 듯이. 2년 뒤에는 나카무라 료헤이라는 자가 비슷한 내용을 또다시 책에 실어 퍼뜨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줄거리와 흡사한 이야기는 오히려 일본의 전통 설화에서 등장한다. 일본 중부 나가노 지방에는,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늙은 부모를 깊은 산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판 고려장이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는 부모가 늙으면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산에 올라가는 과정을 그렸고, 1983년에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했다. 즉, 일본 내부의 설화나 전통 속에 있었던 내용을, 일제가 조선에도 있었던 것처럼 조작하여 동화로 만들고, 식민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꺾으려 했던 것이다.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에도 늙은 부모를 갖다 버리는 ‘기로국(棄老國)’이라는 인도 설화가 실려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인륜과 도덕이 확립되기 전, 미개한 시대에는 그런 일도 실제 있었을지 모른다. 천재지변이나 전란으로 기근이 극한상황에 이르면 식인 행위조차 벌어졌다고 하니, 가족 중 누군가를 버리는 일이 가능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르다. 『고려사』에도, 『삼국유사』에도, 늙은 부모를 버렸다는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다. 타국의 허구적 전설이 일제의 손에서 조선의 그림자처럼 덧씌워진 것일 뿐이다. 고려장은 없었다. 있었던 것은, 늙은 부모에게 따뜻한 밥을 올리고, 무릎 꿇어 안마해드리던 자식들의 정성뿐이었다. 우리는 효를 ‘효도’라 부르기 전에 ‘의무’로 알았던 민족이다. 설화 속 눈물은 슬프지만, 역사 속 기록은 단단하다. 그 어떤 전설보다 확실한 건, ‘노인을 공경한 민족’이라는 우리의 DNA다.
    • 칼럼 / 오피니언
    2025-12-23
  • [옥창열 선생 기고] 역사 바로 알기 시리즈 6탄- 대마도, 불편한 진실 앞에 서다
    옥창열 시인/프로필 - 동국대 졸업, 특정직 국가공무원(3급) 퇴직 - 경기한국수필가협회 부회장 역임 - 『워낭소리의 추억』 등 수필집 3권, 시조집 2권 출간 - 글벗문학상, 석교시조문학상, 경기문학인대상 수상 - 문학 및 음악 유튜브 채널 『시, AI선율로 피어나다』 운영 - 대중가요 450곡 국내외 14개 음반사 발매 독도모임 회장하는 친구 덕분에 그 모임의 고문이란 감투를 쓰고 있다. 그 바람에, 자연히 영토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우경화 바람이 불면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떠들자, 인터넷에서는 독도문제에서 나아가 대마도까지 우리 땅이라는 주장들이 쏟아졌다. 급기야 대마도 연구모임이 결성되고, 대마도 영토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이 생겨나는 등 경향 각지에서 대마도 열기가 달아올랐다. 나도 처음에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읽고는 ‘대마도가 정말 우리 땅이구나!’하는 생각에 친구에게 제의하여 독도 카페 안에 대마도방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들은 한결같이 우리 입장에서 유리한 자료들만 모아놓은 것이어서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일본 측 주장이나 중립적인 제3국의 시각이 궁금했다. 그래서 한일 양국 학자들이 쓴 역사서를 보이는대로 구입하여 읽고, 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각자의 주장과 논리를 비교 검토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 들어가 대마도 관련기사를 찾아보고, 일본에서 외교관으로 오래 근무한 친구의 의견도 들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공부를 하면 할수록 대마도가 일본 땅이란 사실이 확연해져 놀랐다. 나는 대마도가 우리 땅이란 증거를 찾으려고 한 것인데 그 반대의 결과가 되어버렸다. 역사를 제대로 연구한 정통 사학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대개 어중간히 연구한 재야 사학자와 극우파가 무작정 목소리를 높이는 현상도 감지되었다. 아전인수 격으로 몇 가지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는 신주단지 모시듯하고, 수많은 불리한 증거에는 눈을 감아서야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정리되자, 우선 독도모임 회장하는 친구에게 “조선왕조실록에 ‘일본국 대마도’란 표현이 80여 회나 나온다.”고 하면서 관련자료를 보여주었는데, 짐짓 놀라면서도 회장이란 직함 때문인지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도 있다.”면서 몹시 난감해 했다. 경기도의원에 나갔다가 떨어진 후 한일 관계사를 더 깊이 연구한다며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친구인데, 한 순간에 신념을 무너뜨리는 말을 하자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의 입장을 생각해서 독도 카페에서는 내 의견을 밝히지 않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문단 밴드에 부쩍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글이 많이 올라와서 가뜩이나 안 좋은 한일관계가 더욱 악화될 것만 같아 댓글로 내 의견을 밝혔더니, 친일파 같다는 둥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둥 인신공격적인 반응이 나와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그곳에 대마도 모임 회장이 있었다. 이왕 말을 꺼낸 걸 피하기도 그래서 그분에게 조목조목 설명을 하였는데, 그분은 자기 주장만 계속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해봤자 입만 아픈 상황이라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문단 카페에 비슷한 자료들이 계속하여 올라왔다. 또 친일파 소리를 들을까봐 자제하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내 의견을 물어온 분도 계시고 하여 이참에 대마도 영유권 문제를 정리해 보기로 하였다. 이혼소송처럼 첨예한 다툼이 있는 재판의 경우, 원고와 피고의 주장이 완전히 다른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어느 일방의 주장만 들어서는 진위를 분별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대마도 문제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가 수많은 반대증거에 눈을 감고, 과장되거나 왜곡된 근거를 가지고 영토문제에 접근한다면 일본더러 왜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역사왜곡을 하느냐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식이면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는 커녕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우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때 가장 많이 거론하는 근거가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이다.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여 확실히 우리 땅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인데, 거짓이다. 이종무는 대마도에 쳐들어가서 고작 열흘 남짓 머물렀는데, 초전에 기습으로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부 병력을 내륙으로 진입시키다가 궤멸된 후로는 이렇다할 전투를 치르지 않았고, 대마도주가 직접 나와 항복을 한 적도 없었으며, 편지로 좋은 말 몇 마디 하니 감독관이나 군사를 남겨두지도 않고 그대로 철수해 버렸다. 이종무는 귀환 후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사흘만에 실상이 드러나 탄핵을 받았고, 국가적 체면상 유야무야된 게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세종 원년에 상왕이었던 태종도 대마도를 원래 우리 땅이라고 말했다며 무슨 딴 소리를 하느냐고 하는데, 이것은 대마도의 영유권을 논하는데 별반 영양가가 없는 말이다. 대마도는 원래 우리가 개척한 땅이 맞지만, 고려 중기 이후 왜구의 발호로 공도정책을 써서 섬 주민을 본토로 소개한 틈에 왜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일본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만주대륙의 부여계가 신흥 고구려 세력에 밀려 남하하여 백제와 가야지역을 점령하였고, 한반도내 격변 과정에서 이들 세력이 일본열도로 건너가면서 대마도가 중간 기착지가 되었으며, 일본에 정착한 이후에도 이들은 대마도 쪽과 계속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대마도는 거리상 우리와 더 가까우니 우리 쪽과도 다리를 걸치면서 고려와 조선에서 벼슬을 받기도 하고 양다리를 걸치다보니 오해가 생겼다. 다시 말하면, 대마도에 본래 정착한 주민이 우리 땅에서 건너갔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땅이고, 일본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통해 건너온 자신들의 선조가 처음 기착했던 곳이니 자기네 땅이라고 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대마도가 3세기 일본의 야마대국에 예속된 것으로 나오고, 일본 사서인 고사기에는 대마도가 아예 자기들 건국 탄생무대라고 써놓았다. 대마도에 가면 신화 상의 일본 건국시조 신사가 세워져 있는데, 다섯 개의 문이 바다 쪽으로 늘어서서 가야 지역을 바라보는 것이 원래 그들이 출발한 곳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대가야 지역이었던 경북 고령에 가면 일본 천황의 고향이라며 매년 한일 양국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이들은 일본 고대 규슈지역 통일정권이었던 야마대국의 여왕 히미꼬가 3살 때 아버지와 일족을 따라 이곳에서 규슈지역으로 이주하여 여왕이 되고, 그 남동생이 천황이 되었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세종이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의 왜구를 토벌하고 확실하게 한국령(경상도)에 예속시켰다는 주장도 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이종무의 정벌 후, 대마도주가 식량부족으로 인해 조선에 복속을 요청하여 형식상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복속하였으나, 이것은 명이 조선을 형식적으로 봉했듯이 그야말로 ‘형식적’인 것으로 중앙에서 우리 관료가 파견되어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으며,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원상복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종무의 대마도 침공에 대해 토벌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정벌이란 표현을 썼는데, 이것도 대마도를 외국으로 인식한 표현이다. 우리 땅이라면 정벌이 아니라 토벌이라고 써야 맞다. 세종이 대마도를 한국령에 예속시켰다면, 조선왕조실록 세종조 기록에 ‘일본국 대마도’란 표현이 어떻게 4번이나 나올 수 있는가. 또한, 대마도는 명백한 조선 영토로 인식되다가 일본이 근대국가 재편과정에서 일본 영토로 편입했고, 조선팔도총도와 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우리 땅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18세기 일본 민간 지리학자가 대마도를 한국땅이라고 표시한 지도를 가지고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오가사와라 제도를 넘겨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아쉽게도 반대되는 증거들이 넘친다. 5세기 삼국사기 신라 실성이사금조에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11세기 고려사 문종/선종조에 이미 ‘일본국 대마도’로 표시된 기록이 나오며, 15세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그려진 대마도 지도에는 일본국 소속임이 명시되어 있고, 결정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태조부터 고종까지 무려 80여 회에 걸쳐 ‘일본국 대마도’로 표시된 기록이 존재한다. 7세기 백제 멸망시 대마도의 일본 파병군 지원부터 13세기 여몽 연합군의 대마도 침공 및 살육, 16세기 임란시 소서행장의 사위였던 대마도주의 선봉부대 합류 사실만 봐도 대마도가 일본과 훨씬 친근한 관계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본어가 계속 사용되었던 점도 그렇고, 19세기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폐번치현(廃藩置県)이 단행되면서 순순히 일본의 행정구역에 포함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대마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이 더 이상하다. 어설프게 사료를 제시하면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다.’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 규슈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리던 곳으로 본래 왜인들이 세거한 곳이 아니라 하고, 대마도는 신라에 속한 좌호가라와 고구려에 속한 인위가라와 백제에 속한 계지가라 등 삼가라로 나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책은 남북한과 일본 사학계에서 20세기 이후 조작된 위서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광개토왕이 대마도와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임나연정을 설치했다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기존의 모든 역사서는 틀린 것이 된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에다가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는데 대통령이 그런 요구를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냐는 주장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제법에 능통한 이 대통령이 독도를 되찾으려 시도하는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내기 위해 전략상 그랬다는 설이 있다. 이명박 정부 때 김황식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대마도가 누구 땅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우리 땅이 아니라고 답변한 바 있다. 이분은 판사 출신으로 대법관과 감사원장을 지내기도 한 분인데, 애국심이 부족하거나 친일파라서 그런 답변을 했겠는가. 끝으로, 대마도와의 거리가 우리 쪽이 훨씬 가깝다는 주장도 하는데, 국제사법재판소 판례를 보면 거리는 별로 상관이 없다. 프랑스 쪽에 바싹 붙은 섬 하나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분쟁이 붙었는데, 국제사법재판소는 영국의 손을 들어준 적이 있다. 거리보다는 세금 납부를 어느 쪽에다 했는지, 사법 관할권을 어느 쪽에서 행사했는지, 어느 쪽 주민이 들어가 살면서 땅을 점거, 지배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증거 자료를 종합해보면, 대마도는 고려 말 이후 최소 600년 이상 일본의 땅이 되어버렸고, 지금 와서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만주가 옛날에 고구려 땅이었으니 중국더러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오래 외교관 생활을 하고 일본 문화에 대한 저서를 낸 친구도 같은 의견이었다. 대마도 영토 회복운동을 벌이는 분들은 나름대로 애국심을 가지고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더욱 곤혹스럽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목소리를 높여가는 상황에서 민간 차원에서 대마도를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자는 전략 차원이라면 독도를 굳히는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도보다 훨씬 역사적 근거가 빈약한 대마도 영유권 주장이 성공할 가능성도 없고, 오히려 일본 측에 의해 한국은 일본의 영토인 것이 분명한 대마도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부린다며 독도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냐는 역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국가 역량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여론도 불리해지면서 자칫하다가는 일본의 전략에 말려 독도마저 위태해질 수가 있다. 더욱이, 일본은 한미일 군사동맹의 한 축으로서 남북한 간에 전쟁이 터지면 우리를 도울 중요한 우방인데, 영토문제로 극한상황까지 치달아서야 되겠는가. 우리의 행동이 행여 소탐대실은 아닌지, 진정한 애국의 길이 맞는지, 국가의 장래와 발전에 어떤 보탬이 될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할 때다.
    • 칼럼 / 오피니언
    202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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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창열 선생 기고] 역사 바로 알기 시리즈 7탄- 고려장은 없었다
    옥창열 시인/프로필 - 동국대 졸업, 특정직 국가공무원(3급) 퇴직 - 경기한국수필가협회 부회장 역임 - 『워낭소리의 추억』 등 수필집 3권, 시조집 2권 출간 - 글벗문학상, 석교시조문학상, 경기문학인대상 수상 - 문학 및 음악 유튜브 채널 『시, AI선율로 피어나다』 운영 - 대중가요 450곡 국내외 14개 음반사 발매 옛날 고려에서는 늙은 부모를 산에다 버렸다는 속설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고려장(高麗葬)’이라 불렀고, 마치 우리 조상들이 효를 몰랐다는 증표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도 “어디가 고래장(경상도 발음) 터였다더라”는 둥 발 달린 소문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공부를 해보니,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바람은 돌을 깎지,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고려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외지인의 잘못된 인식과 식민의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슬픈 전설이다. 고려시대는 노인을 버리기는커녕, 효를 법으로 강제하던 시대였다. 『고려사』를 들춰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 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재산을 따로 나누고 공양하지 않으면 죄로 다스린다.” 또 다른 기록에는, 효자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노인들에게 예물을 하사한 왕의 손길이 적혀 있다. 이런 나라에서 과연 늙은 부모를 산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겠는가. 말은 마음의 그릇이라 했거늘, 왜곡된 말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오랜 세월 헷갈리게 했던가. 고려장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건 고려시대가 아니라, 1882년 미국인 그리피스의 책 『은자의 나라 코리아』에서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조선 땅을 밟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조선은 일본인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조선’이었다. 거기엔 조선인의 숨결도, 역사도 없었다. 그리고 1924년, 일제 조선총독부는 『조선동화집』에 ‘부모를 산에 버린 사내’ 이야기를 실었다. 마치 우리 민족이 비정하고 패륜적이라는 듯이. 2년 뒤에는 나카무라 료헤이라는 자가 비슷한 내용을 또다시 책에 실어 퍼뜨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줄거리와 흡사한 이야기는 오히려 일본의 전통 설화에서 등장한다. 일본 중부 나가노 지방에는,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늙은 부모를 깊은 산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판 고려장이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는 부모가 늙으면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산에 올라가는 과정을 그렸고, 1983년에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했다. 즉, 일본 내부의 설화나 전통 속에 있었던 내용을, 일제가 조선에도 있었던 것처럼 조작하여 동화로 만들고, 식민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꺾으려 했던 것이다.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에도 늙은 부모를 갖다 버리는 ‘기로국(棄老國)’이라는 인도 설화가 실려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인륜과 도덕이 확립되기 전, 미개한 시대에는 그런 일도 실제 있었을지 모른다. 천재지변이나 전란으로 기근이 극한상황에 이르면 식인 행위조차 벌어졌다고 하니, 가족 중 누군가를 버리는 일이 가능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르다. 『고려사』에도, 『삼국유사』에도, 늙은 부모를 버렸다는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다. 타국의 허구적 전설이 일제의 손에서 조선의 그림자처럼 덧씌워진 것일 뿐이다. 고려장은 없었다. 있었던 것은, 늙은 부모에게 따뜻한 밥을 올리고, 무릎 꿇어 안마해드리던 자식들의 정성뿐이었다. 우리는 효를 ‘효도’라 부르기 전에 ‘의무’로 알았던 민족이다. 설화 속 눈물은 슬프지만, 역사 속 기록은 단단하다. 그 어떤 전설보다 확실한 건, ‘노인을 공경한 민족’이라는 우리의 DNA다.
    • 칼럼 / 오피니언
    2025-12-23
  • [옥창열 선생 기고] 역사 바로 알기 시리즈 6탄- 대마도, 불편한 진실 앞에 서다
    옥창열 시인/프로필 - 동국대 졸업, 특정직 국가공무원(3급) 퇴직 - 경기한국수필가협회 부회장 역임 - 『워낭소리의 추억』 등 수필집 3권, 시조집 2권 출간 - 글벗문학상, 석교시조문학상, 경기문학인대상 수상 - 문학 및 음악 유튜브 채널 『시, AI선율로 피어나다』 운영 - 대중가요 450곡 국내외 14개 음반사 발매 독도모임 회장하는 친구 덕분에 그 모임의 고문이란 감투를 쓰고 있다. 그 바람에, 자연히 영토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우경화 바람이 불면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떠들자, 인터넷에서는 독도문제에서 나아가 대마도까지 우리 땅이라는 주장들이 쏟아졌다. 급기야 대마도 연구모임이 결성되고, 대마도 영토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이 생겨나는 등 경향 각지에서 대마도 열기가 달아올랐다. 나도 처음에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읽고는 ‘대마도가 정말 우리 땅이구나!’하는 생각에 친구에게 제의하여 독도 카페 안에 대마도방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들은 한결같이 우리 입장에서 유리한 자료들만 모아놓은 것이어서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일본 측 주장이나 중립적인 제3국의 시각이 궁금했다. 그래서 한일 양국 학자들이 쓴 역사서를 보이는대로 구입하여 읽고, 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각자의 주장과 논리를 비교 검토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 들어가 대마도 관련기사를 찾아보고, 일본에서 외교관으로 오래 근무한 친구의 의견도 들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공부를 하면 할수록 대마도가 일본 땅이란 사실이 확연해져 놀랐다. 나는 대마도가 우리 땅이란 증거를 찾으려고 한 것인데 그 반대의 결과가 되어버렸다. 역사를 제대로 연구한 정통 사학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대개 어중간히 연구한 재야 사학자와 극우파가 무작정 목소리를 높이는 현상도 감지되었다. 아전인수 격으로 몇 가지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는 신주단지 모시듯하고, 수많은 불리한 증거에는 눈을 감아서야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정리되자, 우선 독도모임 회장하는 친구에게 “조선왕조실록에 ‘일본국 대마도’란 표현이 80여 회나 나온다.”고 하면서 관련자료를 보여주었는데, 짐짓 놀라면서도 회장이란 직함 때문인지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도 있다.”면서 몹시 난감해 했다. 경기도의원에 나갔다가 떨어진 후 한일 관계사를 더 깊이 연구한다며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친구인데, 한 순간에 신념을 무너뜨리는 말을 하자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의 입장을 생각해서 독도 카페에서는 내 의견을 밝히지 않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문단 밴드에 부쩍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글이 많이 올라와서 가뜩이나 안 좋은 한일관계가 더욱 악화될 것만 같아 댓글로 내 의견을 밝혔더니, 친일파 같다는 둥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둥 인신공격적인 반응이 나와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그곳에 대마도 모임 회장이 있었다. 이왕 말을 꺼낸 걸 피하기도 그래서 그분에게 조목조목 설명을 하였는데, 그분은 자기 주장만 계속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해봤자 입만 아픈 상황이라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문단 카페에 비슷한 자료들이 계속하여 올라왔다. 또 친일파 소리를 들을까봐 자제하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내 의견을 물어온 분도 계시고 하여 이참에 대마도 영유권 문제를 정리해 보기로 하였다. 이혼소송처럼 첨예한 다툼이 있는 재판의 경우, 원고와 피고의 주장이 완전히 다른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어느 일방의 주장만 들어서는 진위를 분별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대마도 문제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가 수많은 반대증거에 눈을 감고, 과장되거나 왜곡된 근거를 가지고 영토문제에 접근한다면 일본더러 왜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역사왜곡을 하느냐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식이면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는 커녕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우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때 가장 많이 거론하는 근거가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이다.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여 확실히 우리 땅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인데, 거짓이다. 이종무는 대마도에 쳐들어가서 고작 열흘 남짓 머물렀는데, 초전에 기습으로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부 병력을 내륙으로 진입시키다가 궤멸된 후로는 이렇다할 전투를 치르지 않았고, 대마도주가 직접 나와 항복을 한 적도 없었으며, 편지로 좋은 말 몇 마디 하니 감독관이나 군사를 남겨두지도 않고 그대로 철수해 버렸다. 이종무는 귀환 후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사흘만에 실상이 드러나 탄핵을 받았고, 국가적 체면상 유야무야된 게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세종 원년에 상왕이었던 태종도 대마도를 원래 우리 땅이라고 말했다며 무슨 딴 소리를 하느냐고 하는데, 이것은 대마도의 영유권을 논하는데 별반 영양가가 없는 말이다. 대마도는 원래 우리가 개척한 땅이 맞지만, 고려 중기 이후 왜구의 발호로 공도정책을 써서 섬 주민을 본토로 소개한 틈에 왜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일본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만주대륙의 부여계가 신흥 고구려 세력에 밀려 남하하여 백제와 가야지역을 점령하였고, 한반도내 격변 과정에서 이들 세력이 일본열도로 건너가면서 대마도가 중간 기착지가 되었으며, 일본에 정착한 이후에도 이들은 대마도 쪽과 계속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대마도는 거리상 우리와 더 가까우니 우리 쪽과도 다리를 걸치면서 고려와 조선에서 벼슬을 받기도 하고 양다리를 걸치다보니 오해가 생겼다. 다시 말하면, 대마도에 본래 정착한 주민이 우리 땅에서 건너갔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땅이고, 일본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통해 건너온 자신들의 선조가 처음 기착했던 곳이니 자기네 땅이라고 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대마도가 3세기 일본의 야마대국에 예속된 것으로 나오고, 일본 사서인 고사기에는 대마도가 아예 자기들 건국 탄생무대라고 써놓았다. 대마도에 가면 신화 상의 일본 건국시조 신사가 세워져 있는데, 다섯 개의 문이 바다 쪽으로 늘어서서 가야 지역을 바라보는 것이 원래 그들이 출발한 곳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대가야 지역이었던 경북 고령에 가면 일본 천황의 고향이라며 매년 한일 양국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이들은 일본 고대 규슈지역 통일정권이었던 야마대국의 여왕 히미꼬가 3살 때 아버지와 일족을 따라 이곳에서 규슈지역으로 이주하여 여왕이 되고, 그 남동생이 천황이 되었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세종이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의 왜구를 토벌하고 확실하게 한국령(경상도)에 예속시켰다는 주장도 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이종무의 정벌 후, 대마도주가 식량부족으로 인해 조선에 복속을 요청하여 형식상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복속하였으나, 이것은 명이 조선을 형식적으로 봉했듯이 그야말로 ‘형식적’인 것으로 중앙에서 우리 관료가 파견되어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으며,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원상복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종무의 대마도 침공에 대해 토벌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정벌이란 표현을 썼는데, 이것도 대마도를 외국으로 인식한 표현이다. 우리 땅이라면 정벌이 아니라 토벌이라고 써야 맞다. 세종이 대마도를 한국령에 예속시켰다면, 조선왕조실록 세종조 기록에 ‘일본국 대마도’란 표현이 어떻게 4번이나 나올 수 있는가. 또한, 대마도는 명백한 조선 영토로 인식되다가 일본이 근대국가 재편과정에서 일본 영토로 편입했고, 조선팔도총도와 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우리 땅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18세기 일본 민간 지리학자가 대마도를 한국땅이라고 표시한 지도를 가지고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오가사와라 제도를 넘겨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아쉽게도 반대되는 증거들이 넘친다. 5세기 삼국사기 신라 실성이사금조에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11세기 고려사 문종/선종조에 이미 ‘일본국 대마도’로 표시된 기록이 나오며, 15세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그려진 대마도 지도에는 일본국 소속임이 명시되어 있고, 결정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태조부터 고종까지 무려 80여 회에 걸쳐 ‘일본국 대마도’로 표시된 기록이 존재한다. 7세기 백제 멸망시 대마도의 일본 파병군 지원부터 13세기 여몽 연합군의 대마도 침공 및 살육, 16세기 임란시 소서행장의 사위였던 대마도주의 선봉부대 합류 사실만 봐도 대마도가 일본과 훨씬 친근한 관계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본어가 계속 사용되었던 점도 그렇고, 19세기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폐번치현(廃藩置県)이 단행되면서 순순히 일본의 행정구역에 포함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대마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이 더 이상하다. 어설프게 사료를 제시하면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다.’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 규슈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리던 곳으로 본래 왜인들이 세거한 곳이 아니라 하고, 대마도는 신라에 속한 좌호가라와 고구려에 속한 인위가라와 백제에 속한 계지가라 등 삼가라로 나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책은 남북한과 일본 사학계에서 20세기 이후 조작된 위서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광개토왕이 대마도와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임나연정을 설치했다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기존의 모든 역사서는 틀린 것이 된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에다가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는데 대통령이 그런 요구를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냐는 주장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제법에 능통한 이 대통령이 독도를 되찾으려 시도하는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내기 위해 전략상 그랬다는 설이 있다. 이명박 정부 때 김황식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대마도가 누구 땅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우리 땅이 아니라고 답변한 바 있다. 이분은 판사 출신으로 대법관과 감사원장을 지내기도 한 분인데, 애국심이 부족하거나 친일파라서 그런 답변을 했겠는가. 끝으로, 대마도와의 거리가 우리 쪽이 훨씬 가깝다는 주장도 하는데, 국제사법재판소 판례를 보면 거리는 별로 상관이 없다. 프랑스 쪽에 바싹 붙은 섬 하나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분쟁이 붙었는데, 국제사법재판소는 영국의 손을 들어준 적이 있다. 거리보다는 세금 납부를 어느 쪽에다 했는지, 사법 관할권을 어느 쪽에서 행사했는지, 어느 쪽 주민이 들어가 살면서 땅을 점거, 지배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증거 자료를 종합해보면, 대마도는 고려 말 이후 최소 600년 이상 일본의 땅이 되어버렸고, 지금 와서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만주가 옛날에 고구려 땅이었으니 중국더러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오래 외교관 생활을 하고 일본 문화에 대한 저서를 낸 친구도 같은 의견이었다. 대마도 영토 회복운동을 벌이는 분들은 나름대로 애국심을 가지고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더욱 곤혹스럽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목소리를 높여가는 상황에서 민간 차원에서 대마도를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자는 전략 차원이라면 독도를 굳히는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도보다 훨씬 역사적 근거가 빈약한 대마도 영유권 주장이 성공할 가능성도 없고, 오히려 일본 측에 의해 한국은 일본의 영토인 것이 분명한 대마도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부린다며 독도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냐는 역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국가 역량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여론도 불리해지면서 자칫하다가는 일본의 전략에 말려 독도마저 위태해질 수가 있다. 더욱이, 일본은 한미일 군사동맹의 한 축으로서 남북한 간에 전쟁이 터지면 우리를 도울 중요한 우방인데, 영토문제로 극한상황까지 치달아서야 되겠는가. 우리의 행동이 행여 소탐대실은 아닌지, 진정한 애국의 길이 맞는지, 국가의 장래와 발전에 어떤 보탬이 될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할 때다.
    • 칼럼 / 오피니언
    202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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