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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유진숙] 길 위에서 만난 풍경, 마음을 씻고 달래다
    유진숙 프로필 * 시인 겸 수필가 * 저서 강아지풀 외 2권, * 문인대사진 및 동인지 다수. * 각종 문학상 다수 1일 차: 영주의 불심(佛心)에서 속초 밤바다의 위로까지 아침 7시, 아직 새벽의 푸른 기운이 가시지 않은 양산을 뒤로하고 남편과 함께 차에 올랐습니다. 일상의 소란함을 잠시 내려놓고 떠나는 길,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주할 여정들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습니다. 길은 우리를 이끌고 경상도를 지나 충청도로, 그리고 마침내 강원도까지 이어지는 긴 호흡의 여행이었습니다. 첫 목적지인 영주 부석사에 들어서니, 천년의 세월을 품은 사찰 특유의 아늑함과 고요함이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마침 다가오는 초파일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도량 곳곳에는 오색 빛깔의 연등이 화사하게 장엄되어 있어 사찰의 고즈넉함 속에 따스한 생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 마침내 마주한 무량수전. 안양루 아래를 지나며 바라본 소백산맥의 능선은 마치 잔잔한 바다의 파도처럼 겹겹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나아가 정성스레 준비한 삼베를 올렸습니다. 거친 손길로 정성을 다해 짜였을 삼베의 서늘하면서도 따스한 감촉이 손끝에 닿을 때,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해묵은 잡념들이 서서히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이어 초파일을 기념해 가족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등(燈) 하나를 정성스레 달았습니다. 올 한 해도 우리 가족 모두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서로의 앞길이 이 등불처럼 밝고 평안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습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바람에 살랑이는 연등과 사찰 관내를 가만히 거닐며,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목조 건물들의 아름다움과 그곳에 깃든 침묵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부석사를 떠나 찾아간 곳은 제천의 청풍호였습니다. 넓고 푸른 호수를 품은 청풍호에서 유람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 위에서 마주한 풍경은 한 폭의 거대한 산수화였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옥순봉의 수려한 자태와 거북이를 닮았다는 구담봉의 기암괴석들이 호수 위로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이 오랜 시간 동안 바람과 물로 빚어낸 예술품 앞에 인간의 언어는 그저 작아질 뿐이었습니다. 아찔하게 이어지는 옥순출렁다리를 건너며 호수 위를 걷는 듯한 짜릿함과 함께, 자연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만끽했습니다. 그러나 여행의 발길이 영월의 청령포에 닿았을 때, 청풍호의 활기찼던 마음은 이내 가라앉았습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배를 타지 않고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천혜의 감옥. 그 외로운 섬과 같은 곳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는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겨우 열여덟, 인생의 가장 푸르고 찬란해야 할 나이에 왕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이곳에 갇혀야 했던 어린 임금 단종. 그 소년 왕이 겪었을 두려움과 고독, 그리고 서러움이 청령포의 울창한 송림 사이사이에 그대로 배어있는 듯했습니다. 서강의 물소리는 마치 그날의 울음소리 같았고, 굽어진 소나무들은 어린 임금을 향해 절을 마지않던 충신들의 모습처럼 애처로웠습니다. 가로막힌 자연 속에서 그가 마주했을 고충과 절망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고 아려왔습니다. 역사의 비극이 남긴 잔상이 발길을 쉽게 돌리지 못하게 붙잡았습니다. 청령포의 아린 여운을 가슴에 품은 채,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아 대관령을 넘고 숨 가쁘게 달려 드디어 속초에 도착했습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속초의 바다는 낮 동안 마주했던 수많은 감정들을 묵묵히 받아 안아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양산에서 출발해 영주의 깊은 불심 속에 가족의 안녕을 빌고, 청풍호의 빼어난 비경에 감탄하다가, 청령포의 슬픈 역사에 눈물짓기까지. 남편과 나란히 걸으며 나눈 이 하루의 길은 단순히 거리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씻고, 채우고, 또 달래는 깊은 여정이었습니다. 거친 파도 소리가 가슴을 파고드는 속초의 밤, 밀려왔다 밀려가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오늘 마음에 담은 풍경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긴 여행의 첫 장을 따뜻하게 덮고 속초에서 편안한 여정을 풀었습니다. 2일 차: 고성 통일전망대, 분단의 벽 앞에서 안녕을 묻다 속초에서 맞이한 둘째 날의 새벽은 낮게 가라앉은 구름으로 가득했습니다. 끝내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한 채 아쉬운 아침을 맞이했지만, 밤새 든든한 위로를 건네준 속초의 바다를 뒤로하고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2일 차 여정은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로 향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출입신고서에 도착해 신분증을 제시하고 기록을 마친 뒤, 안보교육관으로 향했습니다. 짧은 영상 관람과 안보 강의를 들으며 가슴 한편이 숙연해졌습니다. 민통선 차량 이동 안내를 숙지하고 통문에서 신분증을 한 번 더 확인받은 뒤에야 비로소 전망대 주차장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차를 대고 전망대를 향해 오르는 5분 남짓한 길, 묘한 긴장감과 감회가 교차했습니다. 지구상에서 같은 민족끼리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토록 철저히 나뉘어 살아가는 나라가 또 있을까. 분단국가의 서글픈 현실이 온몸으로 체감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전망대에 서서 마침내 북녘땅을 눈앞에 마주했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지척에 두고도 더이상 한 발자국도 올라갈 수 없다는 현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구름 낀 하늘 사이로 아스라히 모습을 드러낸 북한의 해금강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이 막힌 길이 뚫리고 마침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염원이 간절해졌습니다. 단종의 고독이 서린 청령포에서 느낀 먹먹함이 이곳 통일전망대의 분단 현실로 이어져 마음의 파도가 크게 일었습니다. 원래는 강원도를 거쳐 서해안까지 긴 여정을 이어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숨을 고르라는 듯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쉽지만 이번 여행은 여기서 접고, 우리의 안식처인 양산 집으로 돌아가기로 남편과 뜻을 모았습니다. 1박 2일의 짧고도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변함없이 아늑했습니다. 경상도에서 충청도, 그리고 강원도의 끝자락까지 달렸던 길 위에서 우리는 영주의 깊은 불심을, 제천의 빼어난 비경을, 영월의 슬픈 역사를, 그리고 고성의 분단 아픔을 목격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풍경들은 일상에 지쳐있던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고, 위로하며, 또 단단하게 달래주었습니다. 비록 빗줄기에 발길을 돌렸으나, 속초 밤바다의 파도 소리와 마음에 아로새긴 풍경의 잔상은 앞으로의 일상을 살아갈 따뜻한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 칼럼 / 오피니언
    2026-05-28
  • [기고 / 유진숙] 푸른 갈라테아와 나란히 걷는 길
    유진숙 프로필 * 시인 겸 수필가 * 저서 강아지풀 외 2권, * 문인대사진 및 동인지 다수. * 각종 문학상 다수 새벽의 잔영이 채 가시지 않은 서늘한 대기가 뺨을 스치는 시각, 여정의 채비를 단단히 하고 미포의 초입에서 첫걸음을 떼어 놓았다. 오늘의 여정은 해운대를 시발점 삼아 청사포의 늑골 같은 품을 거쳐 송정의 백사(白沙)까지, 그리고 다시 그 길을 역행하는 왕복 트레킹 코스다. 아득한 감청색 동해를 우현(右舷)에 두고 온전히 파도의 독백에 귀 기울이며 걷는, 오롯한 사색의 길이다. 아직 본격적인 인파의 소요(騷擾)가 당도하기 전, 해운대의 상흔 없는 바다는 고요하면서도 아침의 생동으로 충만했다. 해변의 끝자락, 미포에서 시작되는 그린레일웨이의 철길 자취로 접어들었다. 머리 위로는 오색의 스카이캡슐이 성근 걸음으로 허공을 수놓고, 발아래로는 유려하게 다듬어진 데크길이 마중을 나온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던질 때마다 가슴으로 밀려드는 대양의 파노라마와 저 멀리 아스라이 걸린 광안대교의 실루엣은 기시감 속에서도 늘 경이롭다. 여명에서 깨어난 햇살이 윤슬이 되어 수면 위에서 부서지는 잔영을 전경(前景) 삼아 걸으니, 이른 아침의 곤비함은 이내 청량한 해방감으로 변모해 간다. 달맞이재의 어스름한 터널을 통과하자, 한 폭의 수묵화처럼 호젓한 포구, 청사포가 은근한 자태를 드러냈다. 적(赤)과 백(白)의 쌍둥이 등대가 서로를 연모하듯 마주 선 풍경은 언제 보아도 다정하다. 해변열차가 철길을 가로지르는 찰나, 건널목에 멈춰 서면 푸른 해안선과 이국적인 열차, 그리고 빛바랜 어촌 마을의 정취가 직조해 내는 아련한 향수에 젖어 들게 된다.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이 그대로 하나의 프레임이 되는 청사포의 미학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릿돌전망대의 서슬 퍼런 초입에 섰다. 투명한 유리 아래로 쉼 없이 소용돌이치는 심연을 굽어보니, 대자연의 위용에 절로 경외심이 일었다. 청사포의 고즈넉한 풍광을 가슴에 새긴 채, 다시 송정을 향해 여정을 재촉했다. 청사포를 지나 구덕포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은 한결 더 원시적인 자연의 숨결을 뿜어냈다. 울창한 송림(松林)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솔바람이 이마의 땀방울을 감미롭게 애무했다. 마침내 당도한 송정해수욕장은 앞서 지나온 해운대의 아취와는 또 다른 원초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수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핑보드에 몸을 실은 채 파도를 희롱하는 청춘들의 역동성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넓게 펼쳐진 은빛 백사장과 거침없이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원한 음료로 타는 목을 축였다. 송정의 죽도정에 올라 소생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지금까지 가슴으로 걸어온 궤적을 소요(逍遙)했다. 이토록 깊은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묵직한 성취감이 가슴을 채워왔다. 이제는 지나온 자취를 되짚어 돌아갈 시간이다. 왕복 여정의 묘미는 일방통행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있다. 정오를 향해 가는 태양 아래 바다의 명도는 더욱 짙은 군청색으로 물들어 갔고, 정적을 깨우는 행인들의 활기찬 잔향이 아침의 여백을 메워 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의 청사포와 해운대는 새벽녘의 수줍음은 지워진 채, 한층 더 찬란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下肢)의 근육은 묵직한 피로를 호소했으나, 걸음마다 묻어나는 갯내음과 파도의 변주곡 덕분에 사색의 끈은 여전히 팽팽함을 유지했다. 출발지였던 미포의 초입으로 귀환하니 육신은 비록 고단했으나, 영혼만큼은 저 광막한 대양을 품은 듯 지극히 풍요로웠다. 해운대의 화려한 서사, 청사포의 서정적인 아리아, 그리고 송정의 활기찬 찬가가 삼중주를 이루는 길. 푸른 바다와 평행선을 그리며 점철되었던 오늘 아침의 궤적은, 건조한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마음을 적셔줄 시린 위로가 될 것이다.
    • 칼럼 / 오피니언
    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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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유진숙] 길 위에서 만난 풍경, 마음을 씻고 달래다
    유진숙 프로필 * 시인 겸 수필가 * 저서 강아지풀 외 2권, * 문인대사진 및 동인지 다수. * 각종 문학상 다수 1일 차: 영주의 불심(佛心)에서 속초 밤바다의 위로까지 아침 7시, 아직 새벽의 푸른 기운이 가시지 않은 양산을 뒤로하고 남편과 함께 차에 올랐습니다. 일상의 소란함을 잠시 내려놓고 떠나는 길,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주할 여정들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습니다. 길은 우리를 이끌고 경상도를 지나 충청도로, 그리고 마침내 강원도까지 이어지는 긴 호흡의 여행이었습니다. 첫 목적지인 영주 부석사에 들어서니, 천년의 세월을 품은 사찰 특유의 아늑함과 고요함이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마침 다가오는 초파일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도량 곳곳에는 오색 빛깔의 연등이 화사하게 장엄되어 있어 사찰의 고즈넉함 속에 따스한 생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 마침내 마주한 무량수전. 안양루 아래를 지나며 바라본 소백산맥의 능선은 마치 잔잔한 바다의 파도처럼 겹겹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나아가 정성스레 준비한 삼베를 올렸습니다. 거친 손길로 정성을 다해 짜였을 삼베의 서늘하면서도 따스한 감촉이 손끝에 닿을 때,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해묵은 잡념들이 서서히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이어 초파일을 기념해 가족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등(燈) 하나를 정성스레 달았습니다. 올 한 해도 우리 가족 모두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서로의 앞길이 이 등불처럼 밝고 평안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습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바람에 살랑이는 연등과 사찰 관내를 가만히 거닐며,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목조 건물들의 아름다움과 그곳에 깃든 침묵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부석사를 떠나 찾아간 곳은 제천의 청풍호였습니다. 넓고 푸른 호수를 품은 청풍호에서 유람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 위에서 마주한 풍경은 한 폭의 거대한 산수화였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옥순봉의 수려한 자태와 거북이를 닮았다는 구담봉의 기암괴석들이 호수 위로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이 오랜 시간 동안 바람과 물로 빚어낸 예술품 앞에 인간의 언어는 그저 작아질 뿐이었습니다. 아찔하게 이어지는 옥순출렁다리를 건너며 호수 위를 걷는 듯한 짜릿함과 함께, 자연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만끽했습니다. 그러나 여행의 발길이 영월의 청령포에 닿았을 때, 청풍호의 활기찼던 마음은 이내 가라앉았습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배를 타지 않고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천혜의 감옥. 그 외로운 섬과 같은 곳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는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겨우 열여덟, 인생의 가장 푸르고 찬란해야 할 나이에 왕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이곳에 갇혀야 했던 어린 임금 단종. 그 소년 왕이 겪었을 두려움과 고독, 그리고 서러움이 청령포의 울창한 송림 사이사이에 그대로 배어있는 듯했습니다. 서강의 물소리는 마치 그날의 울음소리 같았고, 굽어진 소나무들은 어린 임금을 향해 절을 마지않던 충신들의 모습처럼 애처로웠습니다. 가로막힌 자연 속에서 그가 마주했을 고충과 절망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고 아려왔습니다. 역사의 비극이 남긴 잔상이 발길을 쉽게 돌리지 못하게 붙잡았습니다. 청령포의 아린 여운을 가슴에 품은 채,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아 대관령을 넘고 숨 가쁘게 달려 드디어 속초에 도착했습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속초의 바다는 낮 동안 마주했던 수많은 감정들을 묵묵히 받아 안아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양산에서 출발해 영주의 깊은 불심 속에 가족의 안녕을 빌고, 청풍호의 빼어난 비경에 감탄하다가, 청령포의 슬픈 역사에 눈물짓기까지. 남편과 나란히 걸으며 나눈 이 하루의 길은 단순히 거리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씻고, 채우고, 또 달래는 깊은 여정이었습니다. 거친 파도 소리가 가슴을 파고드는 속초의 밤, 밀려왔다 밀려가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오늘 마음에 담은 풍경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긴 여행의 첫 장을 따뜻하게 덮고 속초에서 편안한 여정을 풀었습니다. 2일 차: 고성 통일전망대, 분단의 벽 앞에서 안녕을 묻다 속초에서 맞이한 둘째 날의 새벽은 낮게 가라앉은 구름으로 가득했습니다. 끝내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한 채 아쉬운 아침을 맞이했지만, 밤새 든든한 위로를 건네준 속초의 바다를 뒤로하고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2일 차 여정은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로 향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출입신고서에 도착해 신분증을 제시하고 기록을 마친 뒤, 안보교육관으로 향했습니다. 짧은 영상 관람과 안보 강의를 들으며 가슴 한편이 숙연해졌습니다. 민통선 차량 이동 안내를 숙지하고 통문에서 신분증을 한 번 더 확인받은 뒤에야 비로소 전망대 주차장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차를 대고 전망대를 향해 오르는 5분 남짓한 길, 묘한 긴장감과 감회가 교차했습니다. 지구상에서 같은 민족끼리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토록 철저히 나뉘어 살아가는 나라가 또 있을까. 분단국가의 서글픈 현실이 온몸으로 체감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전망대에 서서 마침내 북녘땅을 눈앞에 마주했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지척에 두고도 더이상 한 발자국도 올라갈 수 없다는 현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구름 낀 하늘 사이로 아스라히 모습을 드러낸 북한의 해금강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이 막힌 길이 뚫리고 마침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염원이 간절해졌습니다. 단종의 고독이 서린 청령포에서 느낀 먹먹함이 이곳 통일전망대의 분단 현실로 이어져 마음의 파도가 크게 일었습니다. 원래는 강원도를 거쳐 서해안까지 긴 여정을 이어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숨을 고르라는 듯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쉽지만 이번 여행은 여기서 접고, 우리의 안식처인 양산 집으로 돌아가기로 남편과 뜻을 모았습니다. 1박 2일의 짧고도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변함없이 아늑했습니다. 경상도에서 충청도, 그리고 강원도의 끝자락까지 달렸던 길 위에서 우리는 영주의 깊은 불심을, 제천의 빼어난 비경을, 영월의 슬픈 역사를, 그리고 고성의 분단 아픔을 목격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풍경들은 일상에 지쳐있던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고, 위로하며, 또 단단하게 달래주었습니다. 비록 빗줄기에 발길을 돌렸으나, 속초 밤바다의 파도 소리와 마음에 아로새긴 풍경의 잔상은 앞으로의 일상을 살아갈 따뜻한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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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28
  • [기고 / 유진숙] 푸른 갈라테아와 나란히 걷는 길
    유진숙 프로필 * 시인 겸 수필가 * 저서 강아지풀 외 2권, * 문인대사진 및 동인지 다수. * 각종 문학상 다수 새벽의 잔영이 채 가시지 않은 서늘한 대기가 뺨을 스치는 시각, 여정의 채비를 단단히 하고 미포의 초입에서 첫걸음을 떼어 놓았다. 오늘의 여정은 해운대를 시발점 삼아 청사포의 늑골 같은 품을 거쳐 송정의 백사(白沙)까지, 그리고 다시 그 길을 역행하는 왕복 트레킹 코스다. 아득한 감청색 동해를 우현(右舷)에 두고 온전히 파도의 독백에 귀 기울이며 걷는, 오롯한 사색의 길이다. 아직 본격적인 인파의 소요(騷擾)가 당도하기 전, 해운대의 상흔 없는 바다는 고요하면서도 아침의 생동으로 충만했다. 해변의 끝자락, 미포에서 시작되는 그린레일웨이의 철길 자취로 접어들었다. 머리 위로는 오색의 스카이캡슐이 성근 걸음으로 허공을 수놓고, 발아래로는 유려하게 다듬어진 데크길이 마중을 나온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던질 때마다 가슴으로 밀려드는 대양의 파노라마와 저 멀리 아스라이 걸린 광안대교의 실루엣은 기시감 속에서도 늘 경이롭다. 여명에서 깨어난 햇살이 윤슬이 되어 수면 위에서 부서지는 잔영을 전경(前景) 삼아 걸으니, 이른 아침의 곤비함은 이내 청량한 해방감으로 변모해 간다. 달맞이재의 어스름한 터널을 통과하자, 한 폭의 수묵화처럼 호젓한 포구, 청사포가 은근한 자태를 드러냈다. 적(赤)과 백(白)의 쌍둥이 등대가 서로를 연모하듯 마주 선 풍경은 언제 보아도 다정하다. 해변열차가 철길을 가로지르는 찰나, 건널목에 멈춰 서면 푸른 해안선과 이국적인 열차, 그리고 빛바랜 어촌 마을의 정취가 직조해 내는 아련한 향수에 젖어 들게 된다.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이 그대로 하나의 프레임이 되는 청사포의 미학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릿돌전망대의 서슬 퍼런 초입에 섰다. 투명한 유리 아래로 쉼 없이 소용돌이치는 심연을 굽어보니, 대자연의 위용에 절로 경외심이 일었다. 청사포의 고즈넉한 풍광을 가슴에 새긴 채, 다시 송정을 향해 여정을 재촉했다. 청사포를 지나 구덕포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은 한결 더 원시적인 자연의 숨결을 뿜어냈다. 울창한 송림(松林)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솔바람이 이마의 땀방울을 감미롭게 애무했다. 마침내 당도한 송정해수욕장은 앞서 지나온 해운대의 아취와는 또 다른 원초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수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핑보드에 몸을 실은 채 파도를 희롱하는 청춘들의 역동성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넓게 펼쳐진 은빛 백사장과 거침없이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원한 음료로 타는 목을 축였다. 송정의 죽도정에 올라 소생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지금까지 가슴으로 걸어온 궤적을 소요(逍遙)했다. 이토록 깊은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묵직한 성취감이 가슴을 채워왔다. 이제는 지나온 자취를 되짚어 돌아갈 시간이다. 왕복 여정의 묘미는 일방통행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있다. 정오를 향해 가는 태양 아래 바다의 명도는 더욱 짙은 군청색으로 물들어 갔고, 정적을 깨우는 행인들의 활기찬 잔향이 아침의 여백을 메워 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의 청사포와 해운대는 새벽녘의 수줍음은 지워진 채, 한층 더 찬란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下肢)의 근육은 묵직한 피로를 호소했으나, 걸음마다 묻어나는 갯내음과 파도의 변주곡 덕분에 사색의 끈은 여전히 팽팽함을 유지했다. 출발지였던 미포의 초입으로 귀환하니 육신은 비록 고단했으나, 영혼만큼은 저 광막한 대양을 품은 듯 지극히 풍요로웠다. 해운대의 화려한 서사, 청사포의 서정적인 아리아, 그리고 송정의 활기찬 찬가가 삼중주를 이루는 길. 푸른 바다와 평행선을 그리며 점철되었던 오늘 아침의 궤적은, 건조한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마음을 적셔줄 시린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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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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